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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수평선은 숲에도 있다
소설가 최민석의 제주행
2018.09.13

본문

수평선은 숲에도 있다

 

이번에 제주도에 갈 때는 소박한 목표를 품었다.

신선한 공기를 맘껏 마실 것. 이것이 전부였다.

 

글 최민석 / 그림 렐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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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어느 날, 나의 아침

숙면을 취한 나는 신문을 챙기려고 문을 민다. 하지만 잘 열리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서 온 팬레터가 문 앞에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이렇군” 하며 능숙하게 창문으로 넘어가 신문을 챙겨 온다. 그러고선 뉴욕, 런던, 상하이 증시에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별 탈 없는지 확인하려 세계 경제면을 펼친다. 아, 이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 1면 톱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렇다. ‘최민석 새 소설 36개국에서 동시 출간, 선주문 1000만 부.’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매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의 보유량과 맞먹는 내 주식들이 완만한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는걸 체크한 후 ‘오늘의 대기 상태’를 확인하려다 경악한다. 미세 먼지농도가 300μg/m³를 넘은 것이다. 순간, 나는 좌절한다. 아무리 작가로서 명성을 드높이고, 자산이 태산처럼 쌓여도, 공기가 나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집 안에서 돌아가는 수십 대의 공기청정기를 보며, “아아 오늘도 외출은 글렀군!” 하며 탄식한다.

 

비록 상상이지만 모든 삶의 요건이 충족되더라도 대기 상태가 나쁘면 우울해질 만큼 공기를 중요히 여긴다. 태생적으로 비강(鼻腔)이약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되, 자연이 좀 더 허락한다면, 숲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숙소를 ‘자연 휴양림’으로 정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하니 실 두께만 한 비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차를 한 대 빌렸는데, 봄비를 맞아 기분 좋게 젖어 있었다. 마치 데이트를 앞두고 막 샤워하고 나온 연인 같았다. 수분을 촉촉하게 머금은 차를 몰아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도로변에 심겨진 가로수도 비를 맞았기에 평소엔 선보이지 않는 잠재된 녹색까지 한껏 내뿜고 있었다. 금주를 하던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맥주를 들이켜듯 공기를 마셨다. 서울로 돌아가면 되새김질 할 수 있게 소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내린 창문 사이로 안개비가 들어와 팔을 적셨는데, 신이 거대한 통에 든 미스트를 뿌려주는 것 같았다. 코는 뚫렸고, 피부는 촉촉해졌다. 숙소에 도착해서 따뜻한 물로 씻고 누우니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숲속인지라 눈이 스르르 감겼듯 자연히 떠졌다. 새벽 숲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드니 높이 솟은 나무들이 일정 높이에서 하늘과 가지런히 닿아 있었다. 이런 표현이 허용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선이 수평선(水平線)이듯 숲속의 나무와 하늘이 만나는 선 역시 수평선(樹平線)이다. 그 수평선 위로 숲은 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해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마다 나무는 조금씩 제 색깔을 드러냈다. 세상 역시 제 색깔을 드러냈다. 구름은 붉은빛을 받으며 하늘에 떠 있었는데, 이번에는 신이 거대한 조명으로 구름을 비추는 것 같았다. 구름은 자신이 걸려 있는 높이마다 층을 형성하며 다른 색을 띠었다. 해에 가까운 층은 도화지에 올려놓은 오렌지 주스 잔의 그림자 색을 띠었고, 그 오렌지빛은 위로 갈수록 점차 옅어졌다. 그리고 상공 어느 지점에 걸린 구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새하얀 색을 띠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 숲속의 모든 새들이 콩쿠르에 참가라도 한 양 일제히 경쟁하며 목청을 울렸다. 자연이 작곡한 음악을 들으며 숲을 걸으니 도시에서 지치고, 실망하고, 갉아 떨어져나간 내 영혼의 결락된 자리가 메워지는 것 같았다. 애청 1순위 음악보다 새의 노래가 나를 더 실용적으로 도닥여주었다. 귀로 맑은 소리가 들어오니, 몸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걷는 동안 해가 온전히 떠올랐다. 세상은 제 빛깔을 마침내 되찾았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정말이지, 이런 표현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숲에서의 아침은 숭고하구나’ 하며 감탄하고 말았다.

 

숲에서 맞이하는 제주의 아침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아마 세계 각국에서 팬레터를 받더라도 계속 그리울 것이다(물론 받아본 적 없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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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에세이를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노라고 고백하며 ‘구라 문학’의 태동을 알린 주인공. 수필 <꽈배기의 맛>, <꽈배기의 멋>, <베를린 일기>와 소설 <능력자> 등을 썼다. 그 좋아하는 제주 막걸리를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부러 한라산에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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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제주iiin 매거진>,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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