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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꿈의 섬, 제주
소설가 최민석의 제주행
2018.08.30

본문

꿈의 섬, 제주

 

이번 제주행의 콘셉트는 이른 봄맞이 수영이었다. 사막처럼 말라버린

현대인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수영장 그림을

봤다면, 내 바람을 이해할 것이다.

글 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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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에 지친 생계형 작가가 비로소 즐기는 비수기 수영장에서의 고적한 시간. 상상하니 뇌 구석에 낀 삶의 이끼들이 씻기는 듯했다. 하여, 서귀포에 있는 한 호텔의 실내 수영장에 들어가니, 그곳은 예상대로 햇볕을 받은 은색 물비늘이 빛나는 소담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린이날 에버랜드 뺨 칠 만큼 꿈과 희망이 왕성하게 자라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고령 사회 걱정 마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항변하듯 활기차게 물장구를 쳐댔다. 물살은 성인키 높이까지 차올랐기에 수마처럼 보였다. 뇌의 이끼가 아니라 내 계획이 씻겨 떠내려가는 듯했다.

 

사우나로 들어가 휴식이나 취하려 하니, 이번에는 전지훈련 온 프로축구단 선수들이 단체로 옷을 벗고 있었다. 이 풍경은 직접 목격하지 않으면 그 기분을 공감하기 어려운데, 간단히 말해 영화 <300>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올누드로 다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헤라클레스 일가친척이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야유회를 온 것 같기도 하다. 수영장 문이 어린이 세로 공간 이동하는 문이었다면 사우나 문은 고대 그리스로 타임슬립하는 문이었다. 마침 일반손님들까지 나가버리니 어쩔 수 없이 나체의 스파르타 병사들 사이에 끼게 돼버렸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심정으로 건식 사우나로 피신해 일단 사태를 관망했는데, 웬걸! 갑자기 선수들이 전부 후다닥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우나에서 나오자마자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목욕탕 안에 감독이 혼자 서 있었다. 그는 밀림의 왕 사자처럼 고독하게 몸에 샤워기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너무나 좋아했던 최순호 선수였다. 최순호가 누구인가. 1986년 월드컵 이탈리아전 때 수비수 두 명을 제치고 강력한 터닝 슛을 장식해 ‘BBC가 선정한 월드컵 10대 골’의 주인공이자 한국 선수 최초로 유벤투스와 인터밀란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구단의 반대와 병역 문제로 포기해야 했던 비운의 스타. 소년 시절의 태양과 단 둘이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 있다는 게 순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그의 벗은 몸을 봐서는 안 될 것 같아 혼자 온탕으로 들어가 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따뜻한 물이 출렁거렸다. 맞다. 나의 옛 영웅이 나란히 온탕에 몸을 담근 채 나와 똑같은 포즈로 목을 젖히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박지성이나 손흥의 열혈 팬이 나이를 먹어 어느 날 갑자기 둘만 온탕에 발가벗은 채로 나란히 있게 된 것이다. 어쩐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벌거벗은 채로 “아아, 여전하시네요”라고 할 수도 없고, “슛 동작을 한번 보여주시죠”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면 과거 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어린 시절 간절히 보고 싶었던 인물을 조우해 이대로 보내버리면 내가 너무나 무심한 인간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히려 감독님이 “저어, 최민석 작가님 맞으시죠? 실은 제가 예전에 ‘헤르타 베를린’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는데, 병역 문제 때문에 못 가서 계속 베를린에 대한 동경이 남아 <베를린 일기>를 읽게 됐습니다. 반갑습니다”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 이 남자, 벗은 나를 왜 쳐다보지?’ 라는 느낌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아, 오해입니다. 저는 아내가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로 살짝 웃었는데, 의도치 않게 온탕에 갑자기 한랭전선이 몰아쳐 왔다. ‘아아, 이게 아닌데’라며 벽만 보며 후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10분이 지났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또 이상하게 흘렀는지, 아니면 나만의 착각인지, 감독님도 내 쪽을 한번 쓰윽 보더니 “흐음” 하며 머리를 쓸고선 또 벽을 주시했다. 그렇다. 그는 일상의 승부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온탕에서의 오래 버티기. 나는 ‘파트너가 되어 영광입니다’라는 심정으로 10분을 더 버텼는데, 인간 삼계탕이 되는 것 같아 결국 포기해버렸다. 다시 수영장에 가 30분을 더 있다 목욕탕으로 왔는데, 그제야 감독님은 “으흠” 하며 몸을 닦고 있었다. ‘여전하시네요. 역시 은퇴해도 지구력은 현역이시네요.’

 

그나저나 제주도 일기에 왜 이런 이야기가 있냐고. 제주도는 이렇게 어린 시절 희망 사항을 해결해준 ‘꿈의 섬’이랄까. 갈까 말까 망설일 때는 가보라는 말이 있듯이 제주로 왔기에 한때는 간절히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야 만 것이다(나체까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여행은 일단 떠나고 보는 게 좋다’는 걸 절감했다. 여러분 꿈과 희망이 이뤄지는섬, 제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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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에세이를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노라고 고백하며 ‘구라 문학’의 태동을 알린 주인공. 수필 <꽈배기의 맛>, <꽈배기의 멋>, <베를린 일기>와 소설 <능력자> 등을 썼다. 그 좋아하는 제주 막걸리를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부러 한라산에 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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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제주iiin 매거진>, 201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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